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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잊혀진 전쟁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정연진의 ‘원코리아 운동’ 이야기 (38)

다큐멘터리 ‘Memory of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의 기억)’ 상영회

한국전쟁은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린다. 아마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3년간이나 지속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38선을 휴전선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전쟁이어서 하루 빨리 ‘잊고 싶은’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들에게 한국전쟁은 잊혀지지 않는, 잊을 수 없는 전쟁이기도 하거니와, 분단의 고통이 계속되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최근 들어 한국전쟁의 아픔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지구촌 시민사회에 알리려는 노력에 재미 한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각종 영화제에 인정받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단체는 그 동안 이들 영화제작자들과 접촉해 오면서 이들 작품을 소개하려는 노력을 모색해왔다. ‘Memory of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의 기억, 2013년작 다큐)의 제작자 임 램지, ‘The Other Side of the Mountain’(산너머 마을, 최초의 북미합작영화, 2012년작 극영화) 제작자 배병준, ‘Fading Away’(사라져가다, 2014년작 다큐)의 제작자/감독 크리스토퍼 리가 그러한 분들이다.

지난 3월 21일 금요일 저녁, AOK(Action for One Korea) 로스앤젤레스 출범 1주년을 기해 마련된 ‘One Korea Day’ 행사에서 ‘잊혀진 전쟁의 기억’ 영화 상영회와 함께 제작자 출연진과의 대담시간을 가졌다. 이번 행사에는 보스턴의 영화제작자, 보스턴 버클리 음대생들의 축하영상 참여, 그리고 이민 1세, 1.5세, 2세들이 동참하여 지역과 세대를 아우르는 참신함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의 기억’이 로스앤젤레스 윌셔가 드림웨딩홀에서 ‘원코리아데이’ 영화의밤 행사로 선보였다. 포스터의 일부 [자료사진 – 정연진]

‘Memory of Forgotten War 잊혀진 전쟁의 기억’은 한국전쟁 생존자, 특히 평범한 민간인들의 체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조명한 기록영화이다. 전순태, 김희복, 이민용, 박 기 4인의 재미한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가족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 분단 이후 이산가족으로서 겪은 고통과, 미국에 이민 와서 북의 가족들과 상봉한 이야기 등이 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와 여지원 노스웨스턴대 교수의 한국전쟁에 관한 해석이 곁들여지면서 전쟁의 기억은 입체적으로 재구성된다.

이 영화는 3년의 제작기간 끝에 2013년에 완성되어 미국의 주요도시에서 순회 상영회를 가졌고, 아시안필름, LA 영화제, 뉴욕 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된 뛰어난 다큐멘터리이다. 분단을 상징하기 위해 영화의 길이도 38분으로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참조 www.mufilms.org)

국가나 정부의 시각이 아닌, 이념을 배제하고 개인과 가족의 시각으로 더 나아가 인류애적 시각이 녹아든 작품이어서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영화이다. 수많은 민간인이 죽임을 당한 참혹한 전쟁에서 생존자들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했는지, 또한 정전 6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인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분단과 이산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고 어째서 그 고통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대를 이은 통일운동 활동가, 임 램지 교수

이번 ‘원 코리아 데이’ 행사에서 ‘잊혀진 전쟁의 기억’의 제작자인 임 램지 교수님을 초청해 제작자와 출연진이 함께하는 대담시간을 가졌다. 임 램지 선생님은 보스턴대학 심리학과 명예교수인데, Korea Policy Institute 자문위원이자, 보스턴대학 인권과 국제정의센터 방문교수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미캠페인’(National Campaign to End the Korean War) 활동가이기도 하다.

▲ 영화상영후 대담시간. 왼쪽부터 출연자 전순태 선생님, AOK 실행위원 조순석 님, 제작자 램지 림 교수, AOK 정연진 대표 실행위원, 출연자 김희복 여사. [자료사진 – 정연진]

임 교수님은 2세대 운동가이다. 그의 아버지 임창영 박사는 1930년대 한국을 떠나 미주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또 통일운동에 헌신한 선구자이시다. 1940년대 해방조국에 기여하기 위해 수년간 귀국해서 활동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에게 실망을 느껴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장면 정부 때 한국 주유엔대사를 지내기도 했다.임 교수는 제수(sister-in-law) 디앤 보쉐이 림 씨와 공동제작하여 이번 영화를 만들었는데,디앤 씨는 여러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영화제작자로, 입양아 문제를 다룬 ‘차정희에 관하여’ 라는 다큐가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 ‘잊혀진 전쟁의 기억’의 공동제작자 – 디앤 보쉐이 임과 램지 임 교수. [사진출처 – Memory of Forgotten War 페이스북]

임 교수는 아시안 아메리칸학을 연구하던 중 전쟁이라는 참화를 체험한 사람들의 트라우마가 세대를 이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전쟁 생존자들의 구술사 프로젝트를 멀티미디어 전시회로 만든 ‘현존하는 과거 Still Present Pasts: Korean Americans and the “Forgotten War”’ 총감독으로 활약하여 미주와 한국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잊혀진 전쟁의 기억’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왜 이러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에 임 교수는 “재미한인들에게 ‘missing history’ 잃어버린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답하신다. “미국에서도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고 있고 한인이민사회에서도 (이념적인 문제 때문에) 침묵해온 역사이다. 특히 2세들은 이 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 미처 모르고 있다. 한국전쟁을 진정으로 끝내기 위해 우리는 이 전쟁을 다시금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임 교수는 아버지 임창영 박사와 어머니 임보배 여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Channing & Popai Liem 교육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부모님 대를 이어 자신과 동생 폴 림, 제수씨 부부의 활동, 그리고 그의 두 딸도 사회활동가가 되어 한국에 나가 사회정의 운동에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작품은 주로 2세들을 위해 분단문제의 원인과 극복에 관한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는 임 교수는 차세대와의 교감과 소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3대째 대대로 사회운동, 통일운동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특별한 가족사 자체도 기록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영화에서 출연진 중의 한 분 이민용씨가 방북해 상봉한 형님과 활짝 웃고 있다. [사진제공 – Mu Film]

“행동해야만 통일이 올 수 있습니다” “통일은 누가 선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담시간에는 출연자 4가족 중에 남가주에 거주하는 김희복 할머니와 전순태 선생님을 모실 수 있었다. 1923년생으로 올해 92세이신 김 할머니는 ‘버스승객조합’이라는 버스승객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비영리봉사단체에 14년째 봉사하고 있고, 많은 사회이슈 단체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남가주 한인사회에서는 잘 알려진 열혈 활동가이시다.

할머니의 고향은 평양. 6.25전에 서울로 시집오셨는데, 이북에 어머니와 언니가 살고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 오면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판단한 할머니는 60이 넘은 나이에 두 아들이 유학이후 정착한 미국으로 오셨다. 방북 기회를 탐색하다가 드디어 2001년도에 기회를 얻어 북을 방문할 수 있었다.

북에 방문해 한평생 그리던 어머니와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으나, 통탄스럽게도 60세를 못 넘기고 모두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조카들과 자손을 만난 것이 위안이 되었다. 조카들이 “통일되면 이모 (김희복 할머니)가 꼭 올 꺼다, 꼭 기다려라!”라는 언니의 마지막 말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 영화에서 어린 시절 땅콩 껍질로 귀걸이를 만들며 놀았다고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 장면을 연출하는 등 다큐 영화에서 웃음을 선사하는 김희복 출연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북에 많이들 가서 대화하고, 접촉하고, 배워야 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진제공 – 김희복]]
▲ 2001년 북에 가서 조카들을 만난 김희복 할머니. [사진제공 – 김희복]

영화에서 김 할머니는 “북에 다녀오면 사람들이 빨갱이, 라고 하도 하는 통에… 빨갱이란 말도 참 많이 들었어. 그러나 개의치 말아야해. 북에 많이들 가서 대화하고, 접촉하고, 배워야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김치 한쪽을 청중에게 권한다. “나는 이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 한국의 김치가 참 맛있지. 그러나 김치가 맛있다는 것을 책으로 백권을 읽어도 소용없어. 직접 먹어봐야, 먹어봐야 알아”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대담시간에도 김 할머니는 큰 박수를 받았다. “나는 나이가 많아요. 그렇지만 통일을 꼭 보고나서 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은 말로만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행동해야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통일됩니다”라고 힘주어 목소리를 높일 때 청중은 모두 힘찬 박수를 보내며 한 마음이 되었다.

▲ 대담시간에 ‘한국전쟁의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라고 강조하는 전순태 출연자. [자료사진 – 정연진]

영화에서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전쟁으로 4백만 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520만 가량 죽었는데 절대 다수가 민간인들이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전순태 선생님. 그의 고향은 개성, 10대의 어린 나이에 보따리 짐을 싸들고 금방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서울에 왔다가 영영 식구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북에 있어서 남에서는 변변한 직장에 취직할 수가 없었다. 유학이후 미국에 정착했고, 민간통일운동에 몸담으면서 1980년대부터 자주 방북했다. 자신의 가슴에 있는 점을 보여주며 “순태가 살아 돌아왔어요!”라고 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하던 순간은 영영 잊을 수 없다. 어머니는 이제 돌아가셨지만 살아생전에 꿈에 그리던 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북을 자주 방문한 전 선생님은 “75회 이후로는 몇 회 더 갔었는지 세는 것을 중단했다”라고 하신다. 이산가족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통렬히 겪었기에 미주 이산가족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1988~1991년에는 매번 30명 가량의 재미동포 이산가족들을 안내하여 북의 혈육들을 만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대담 전에 “통일은 누가 선사해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전 선생님의 평상시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미국의 팽창정책으로 인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직시하고 민족의 대단결을 통해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청소년들의 이산가족문제 프로젝트 ‘Missing Pieces’

미주한인사회의 원로 언론인 이경원 선생이 설립한 ‘KW Lee 리더십센터’에서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이산가족 문제 프로젝트를 AOK 행사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이산가족 이야기가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이를 스토리로 구성해 지구촌에 적극 알림으로써, 세대를 아울러 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했다.

▲ 이산가족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는 이경원 리더십센터의 고등학생들. 왼쪽부터 정혜성, 김상민, 신푸름, 조 레이철 학생.[자료사진 – 정연진]
▲ 이산가족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있는 신푸름 학생. [자료사진 – 정연진]

학생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기 가족이나, 주변의 이산가족 중에 한 인물을 정해서 그 인물의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프로젝트이다. 모두 자기 프로젝트를 발표할 때마다 극단의 세기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드라미틱한 삶이 ‘missing pieces’ 마치 잃어버린 삶의 조각을 하나 하나 맞추는 것처럼 재구성된다. 자기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학생들 모습 하나 하나가 희망으로 빛나보였다.

이산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통해 재구성한 한국 전쟁 이야기. 지구촌 시민사회가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을 진정으로 끝내는데 동참할 수 있도록, 세대를 이어 세대를 아울러 우리들의 노력은 AOK 활동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